“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색과 선으로 번역한 화가” 이성자, 삼성 아트 스토어에서 다시 피어나다
[kbn연합방송=김진영 기자] K팝, 드라마, 영화에 이어 애니메이션까지, 바야흐로 ‘K-컬처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반만년 지속돼 온 한국의 문화가 드디어 세계에서 꽃을 피웠다고 말하지만 이미 한 세기 전에 세계 미술의 중심에서 한국의 정신을 그림으로 드높인 화가가 있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고(故) 이성자 화백은 세계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한국 여성 추상주의 화가로 꼽힌다.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이제 삼성 아트 스토어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감상할 수 있다. 삼성 아트 스토어는 삼성 TV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미술 작품 구독 서비스로, 전 세계 유명 갤러리와 예술가들의 작품 4,000여 점을 제공한다.
삼성전자가 1세대 한국 추상미술가 고 이성자 화백의 작품을 아트 스토어를 통해 전 세계에 선보인다. 사진은 1977년 파리 프로세시옹가(Rue de la Procession)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에 앞서 재료를 준비하고 있는 이성자 화백의 모습.
이번 작품 론칭은 단순한 디지털 전시를 넘어선다. 오랜 시간 작가의 예술세계를 기록하고 연구해 온 갤러리현대의 방대한 아카이빙(archiving)이 삼성의 기술력과 만나 더 많은 이들이 이성자 화백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삼성 뉴스룸이 갤러리현대 권영숙 이사를 만나 이성자 화백의 예술적 유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독자적인 시각 언어를 구축한 고 이성자 화백은 당시 여성 작가로서는 드물게 국제무대에서 주목받은 1세대 한국 추상미술가다. 자연과 우주, 존재에 대한 사유를 회화로 확장한 그의 작품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여전히 강렬한 울림을 전한다.
한국 추상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선구자
Q. 이성자 화백은 한국 추상미술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인물로 평가되는가?
이성자는 한국미술사에서 60년간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해 가며 스스로 추상미술언어의 확장을 이뤄낸 최초의 여성 추상 화가이다. 피카소, 폴 고갱 등이 거쳐간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emie de la Grande Chaumiere)’에서 추상화와 조각을 배우며 현대 추상미술에 관심을 가진 이성자의 재능은 곧 빛을 발했다. 1956년 《국립미술협회전》에 첫 출품 때, 평론가 조르주 부다유(George Boudaille)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데뷔한 것이다. 이후 그는 여성으로서 현대사와 가부장적 사회 문화 속에서 겪은 슬픔과 고통을 미술을 통해 극복해 나갔다.
이성자의 추상회화는 표현주의자들처럼 내면의 거침없는 표현이 아니라, 상처를 보듬어내고, 인류의 삶을 관조하는 창조적인 에너지로서의 미술을 지향한다는 점에 있어서 당대 미술에서도 차별성이 돋보인다. 그의 세계관은 생애 작업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변화하며, 그 흐름은 고스란히 작품에도 반영된다.
▲2025년형 삼성 Neo QLED에 전시된 1962년작 ‘내가 아는 어머니(A Mother I Remember).’ 이는 ‘여성과 대지’ 연작 중 하나로 작가의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한국적 정서가 담긴 작품이다. 삼성 아트 스토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Q. 이성자 화백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나 미학적 특징을 꼽는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우주 삼라만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정신문화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미덕이다. 그러한 동양적 사유를 서구 추상회화의 언어로 풀어낸 이성자의 작업은 서구 추상회화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시도로서 한국 추상미술사뿐 아니라 세계 미술사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의 예술세계를 요약하는 키워드로는 이성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심은록의 단행본에서 제시된 ‘음, 양, 그 사이를 흐르는 은하수’를 제안한다. 그녀의 세계관을 잘 드러내 준다고 생각한다.
삼성 아트 스토어, 디지털이 되살린 이성자의 손끝과 숨결
Q. 이성자 화백과 70년간 깊은 인연을 이어 온 갤러리현대가 보유한 방대한 아카이브 자료가 한국 미술사에서 가지는 의미와, 이를 통해 작가의 예술세계를 어떻게 재조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성자는 한국전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 있는 결단으로 파리에서 주목받는 여성미술가로 성장했다. 갤러리현대 창업주 박명자 회장은 1974년 이성자의 추상회화만으로 기획된 개인전을 개최했다. 프랑스에서 먼저 인정받은 한국 최초의 여성 추상화가는 이후 갤러리현대 전속작가로서 본격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를 통해 갤러리현대에 축적된 방대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다각도에서 연구와 리서치를 할 수 있었다.
이성자는 서구의 모더니스트 추상회화의 연장선에서 결이 다른 새로운 추상 언어를 개척해 나간 인물로서,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현 세대에도 차원이 다른 영감을 준다. 전 세계적으로 남성 화가 중심의 20세기 현대미술 시기를 지나 여성미술가들에 대한 활발한 재조명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성자 작가가 걸어온 길은 미술사에 큰 획으로 남아있다.
갤러리현대는 작가에 대한 방대한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성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했으며, 아직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시를 기획해 나갈 예정이다.
Q. 아트 스토어와 협업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또 이성자 화백의 작품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중과 만나는 것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아트 스토어와 같이 한계가 없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해외 대중에게까지 널리 소개되어 더 많은 이들이 이성자의 회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25년형 삼성 Neo QLED에 전시된 ‘바우지라드 거리의 눈(The snow from Vaugirard street).’ 1955년 몽파르나스(Montparnasse)로 이사한 작가가 6층 방에서 보이는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원근감이 깨진 파리의 도시 풍경을 담아내며, 단청색 톤의 배경은 과감히 단순화되어 있다. 눈으로 덮인 전경은 화면 밖으로 뻗어 나오는 듯한 인상적인 깊이를 만들어낸다. 삼성 아트 스토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Q. 아트 스토어를 통해 관람객이 이성자 화백의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경험할 수 있을까?
이성자 작가의 작품은 여러 겹의 레이어(layer, 층)가 섬세하게 중첩되어 구성된다. 특히 판화 칼로 목판을 깎으면서 구현하는 짧고 굵으면서도 끝부분이 얇아지는 특유의 선을 디지털 화면으로 천천히 감상할 수 있다면, 작가의 손길, 숨결을 직관할 수 있을 것 같아 더없이 기대된다.
Q. 아트 스토어에 공개되는 작품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었나?
시기별로 대표작 및 의미가 있는 작품들을 선별했다. 추상회화를 예고하는 1959년작부터 마지막 작품 활동 시기의 ‘우주’ 연작까지 작가의 생애를 따라 변주해 간 작품의 세계관을 연대기적으로 볼 수 있게 선정했다.
Q. 아트 스토어로 감상하면 가장 좋을 3가지 작품을 추천한다면?
-미술에 입문한 지 5년째에 완성된 No.1 The snow from Vaugirard street
-1960년대 대표작 No.7 A Mother I remember
-작가의 마지막 페인팅 No.19 A City of September
Q. 이번 아트 스토어 론칭을 통해 이성자 화백의 작품을 새롭게 만날 대중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고난 없는 인생이 없다지만, 이성자 화백은 1918년 일제강점기 시기에 태어나 격동의 현대사와 더불어 슬픈 가정사를 겪었다. 그럼에도 남다른 용기와 강인함으로 소통, 공존, 생의 기쁨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자유롭게 형상화한, 이성자 화백의 생애 대한 예찬이 충만한 화면을 만끽하시길 권한다.
▲2025년형 삼성 Neo QLED에 전시된 2008년작 ‘9월의 도시(A City of September).’ 작가가 90세에 완성한 마지막 작품으로 작가의 예술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생전의 대립적 요소가 화합하여 초월적 우주로 회귀하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삼성 아트 스토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삶이 곧 예술이 된 도전의 여정
Q. 작가가 끊임없이 화풍을 바꾸며 새로운 주제에 도전한 계기는 무엇인가?
이성자 작가가 1960년대에 창작한 ‘여성과 대지’ 시리즈는 1965년 첫 귀국전이 있기까지 이어진 작품군으로,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과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고 싶은 마음을 한 획, 한 조각에 담아낸 모성의 기록이다. 각각의 붓질과 조각은 자식에게 주는 한 술의 밥이자, 머리 쓰다듬이다.
1960년대 내내 땅을 가꾸며 생명을 길러내던 이성자의 시선은 이후 도시 상공으로 올라가 수직적 반복이 강조되는 ‘중복’과 ‘도시’ 시기의 작업으로 표현된다. 그는 1965년 서울에 돌아와 훌륭한 청년들로 자라난 아들들과 재회하면서 그간의 애달픔이 해소되었다고 한다. 한결 자유로워진 마음으로 1969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 맨해튼의 고층 빌딩과 메트로폴리탄 스케일의 수직적 도시의 반복되는 조밀함 등은 새로운 영감을 줬다. 특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바라본 야경, 층층이 포개진 고층 빌딩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불빛들, 자동차가 만들어 내는 붉은빛의 흐름 등은 중첩된 선과 한결 선명해진 색으로 작품에 표현됐다.
이렇듯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되어 왔다. 인생의 사이클을 따라 삶을 관조하면서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회화로 풀어내는 도전을 멈추지 않다 보니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고 이성자 화백은 여성 작가의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1950~60년대에 특유의 재능으로 현지 문화계와 직접 소통하며 프랑스 내에서 입지를 다져갔다.
Q. 작가가 ‘음과 양이 만나는 반원’을 ‘시그니처 모티브’로 삼은 이유와 그 안에 담은 정체성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이성자는 미술을 통한 소통에 관심이 많았다.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기호나 기하학적인 모티브를 찾아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갔던 수로왕릉의 숭인문에 새겨진 커다란 태극문양을 떠올리곤 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초현실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한 감격을 느꼈다고 한다. 이성자는 하나의 캔버스 안에 ‘상반된 것의 공존’, ‘음과 양, 동양과 서양, 대지와 하늘, 현실과 이상같이 상반된 것의 공존’을 담아내며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어 갔다.
▲프랑스 문화재로 지정된 이성자 화백의 창작 공간 ‘은하수’ 전경. 이성자 화백이 직접 설계한 은하수는 음양의 조화를 형상화한 반원형 구조가 특징이다.
삼성 아트 스토어에서 인생의 난관을 뛰어넘고 스스로를 보듬으며 깊은 사유로 무르익은 이성자 화백의 지성과 감성, 영성을 온전히 경험해 보길 바란다.
kimjy4385@ikb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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